방송을 보다가 리모컨을 내려놨어요.
MBC 실화탐사대에서 방영된 피터팬아빠 이야기였어요.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도 자신의 죽음보다 아들의 내일을 먼저 걱정하는 아버지.
중증 자폐 아들을 홀로 키워온 20년.
화면을 보면서 자꾸 제 손이 떨렸어요.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언젠가 제가 마주해야 할 이야기였어요.
1. 피터팬아빠가 남긴 질문
전경철 님은 아들을 피터팬이라고 불러요.
몸은 성인이 됐지만 사회성 발달은 2세에 머물러 있는 아들.
보통 아이들이라면 몇 년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순수함을 20년 넘게 간직한 채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
방송을 보면서 아버지가 남긴 말 한마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너무 또렷이 기억하지 말고, 희미하게 기억해달라는 말.
왜 또렷이 기억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곁에 없을 때 아들이 아빠를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면, 그리워하고 찾고 기다릴까 봐가 아니었을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아들이 자신을 버린 거라고 생각할까 봐.
그래서 차라리 따뜻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기억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어요.
자신의 슬픔보다 아이의 슬픔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 이게 자폐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구나 싶었어요.
2.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한다면
봄이를 키우면서 머릿속 한켠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질문이 있어요.
내가 없어진 뒤에 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봄이가 어릴 때는 그래도 조금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그 두려움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들었어요.
전경철 님도 처음엔 그 두려움이 먼 미래의 이야기였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현실이 됐을 거예요.
그게 나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방송을 보는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할 날이 온다면, 나는 봄이에게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아직 그 질문의 답을 모르겠어요.
3. 장애와 노화가 함께 오는 미래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는 늙어가요.
봄이의 장애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오히려 성인이 되면 지원 체계가 바뀌고, 돌봄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더 복잡해지는 부분이 생겨요.
그 복잡해지는 미래를, 저는 점점 늙어가면서 감당해야 해요.
내가 건강할 때는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아프거나,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온다면 봄이는 어떻게 될까요.
장애와 노화가 함께 오는 미래...
이건 자폐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 묵직하게 안고 살아가는 두려움이에요.
전경철 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 두려움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것 같았어요.
4. 1000곳의 문을 두드린 아버지
전경철 님이 두려워했던 건 자신이 떠난 뒤에 아들이 세상에 홀로 방치되는 일이었어요.
아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시설을 찾기 위해 전국 1000곳이 넘는 기관의 문을 두드렸지만, 중증 장애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해요.
1000곳.
이 숫자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어요.
거절당할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이게 우리 사회가 중증 장애인과 그 가족에게 내놓는 현실이구나 싶었어요.
봄이도 언젠가 그 길을 마주하게 될 텐데, 그때 저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아직 그 답을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경철 님처럼 1000번의 거절을 견디고 있는 부모님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 세상이 함께 바라봐줬을 때
방송 이후 두 부자를 향한 응원이 쏟아졌어요.
댓글로 마음을 전한 분들, 후원금을 모아주신 분들, 가장 큰 숙제였던 아들의 거처 문제도 풀렸어요.
전경철 님은 60년 넘게 살면서 처음으로 세상이 이렇게 따뜻한 곳이라는 걸 알았다고 하셨어요.
60년을 살면서 처음 알았다는 것.
그 말이 얼마나 오랜 외로움과 싸워온 시간의 고백인지, 같은 길을 걷는 부모로서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또 눈물이 났어요.
세상이 함께 바라봐줄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걸 이번에 다시 한번 봤어요.
6. 피터팬재단과 피터팬네버랜드
전경철 님은 중증 자폐스펙트럼장애인을 위한 24시간 돌봄 공동체마을 피터팬네버랜드 설립을 꿈꾸고 있어요.
다시는 이 땅에서 중증 장애라는 이유로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아이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에세이 인세 수익 전액을 피터팬재단 발족과 운영에 쓰기로 했다고 해요.
자신의 몸이 아픈 와중에도 다음 세대의 장애인 가족들을 위한 길을 만들려는 것.
이 꿈이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장애인 가족들이 마주하는 현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게 가슴 깊이 박혔어요.
봄이를 키우면서 저도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질문
"내가 없어진 뒤에도 봄이가 안전하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7. 방송 출연을 결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더구나 가장 사적인 아픔을, 카메라 앞에 꺼내놓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전경철 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 현실을 알게 됐어요.
중증 장애인 가족이 어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돌봄 시스템에 어떤 구멍이 있는지를, 방송 하나가 수백만 명에게 알렸어요.
같은 자폐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 더 나아지기를 바라요.
8. 봄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도 봄이의 미래를 생각해요.
내가 건강할 때, 내가 곁에 있을 때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없어진 뒤에도 봄이가 안전하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요.
피터팬아빠 전경철 님과 피터팬 두 분이 남은 시간을 아프지 않게, 따뜻하게 보내시길.
그 시간이 아주 천천히, 정말 아주 천천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도 느린 걸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본 포스팅은 MBC 실화탐사대 방송 내용을 시청한 개인적인 감상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전경철 님의 에세이 『안녕, 피터팬』은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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